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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가 적은 아동의 감정표현 훈련

seven09 2026. 4. 3. 01:09

말수가 적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답답함보다 걱정이 먼저 밀려오게 됩니다. 혹시 마음속에 무언가 쌓여 있는 건 아닐까, 표현하지 못해서 더 힘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현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말이 아닌, 마음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말수가 적은 아동은 종종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이는 정서 발달과 또래 관계 형성에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아동에게 적절한 감정표현 훈련을 제공하면 내면의 불안을 완화하고, 안정적인 사회성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본 글에서는 실제 적용 사례를 통해 감정표현을 유도한 다양한 방법과 그 효과를 보다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특히 단순한 방법 소개가 아닌, 아이의 변화 과정과 감정의 흐름까지 함께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그림일기 활용

말을 꺼내기 어려운 아이의 마음을 가장 먼저 열어주는 것은 의외로 ‘말이 아닌 표현’입니다.

말이 적은 아동에게 감정표현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담 없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은 시각화된 매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그림일기입니다. 7세 남아 사례에서, 그는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를 그저 흑백으로 칠한 그림만 그렸습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던 아이였지만, 교사가 “오늘은 어떤 기분이었어?”라고 조용히 물으며 그림을 함께 바라봐 주자, 아이는 한참 뒤 “비가 와서 기분이 축축해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마음이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이는 하루하루 기분을 비로, 햇살로, 번개로 표현하면서 감정을 언어화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미술치료에 참여했던 한 6세 여아는 친구와 다투고 난 뒤, 일기에 찢어진 하트를 그리고 “화가 나서 마음이 부러졌어요”라고 적었습니다. 어른이 보기엔 단순한 그림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아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그림이라는 창구를 통해 더 솔직하게 드러납니다. 그림일기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읽는 첫 번째 문장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감정카드 훈련

아이의 감정에도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비로소 표현이 시작됩니다.

말수가 적은 아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제한되어 있어, 일상적인 감정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카드는 다양한 표정과 감정 단어가 적혀 있는 카드로, 아동이 자신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선택하게 돕는 도구입니다. 6세 여아 사례에서, 처음 상담실에 왔을 때는 질문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기분 하나 골라볼까?”라는 가벼운 질문과 함께 감정카드를 보여주자, 아이는 망설이다가 한 장을 집었습니다. 그 작은 선택이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뻐요”, “싫어요”처럼 단순한 단어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돼요”, “속상했어요”, “조금 무서웠어요”처럼 점점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감정카드는 단순히 감정을 고르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알아차리고 말로 연결하는 과정’을 만들어 줍니다. 특히 가정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어, 부모가 하루 한 번 “오늘은 어떤 카드야?”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와의 감정 소통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은 아이의 마음에 단어를 붙여주는 작업이며,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힘으로 이어집니다.

역할극과 인형놀이

말하지 못한 감정은 다른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결국 나오게 됩니다.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동은 대리 표현 방식을 통해 감정을 드러냅니다. 특히 인형놀이와 역할극은 아이가 부담 없이 자신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한 5세 남아는 부모의 이혼 이후 극도로 말을 아끼며 지냈습니다. 상담 초반에는 어떤 질문에도 반응이 없었지만, 동물 인형을 이용한 놀이를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는 고양이 인형을 들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나는 아빠가 나 안 좋아해서 싫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아이가 처음으로 꺼낸 진짜 감정이었습니다. 이후 아이는 인형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점점 실제 자신의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역할극은 또래 관계에서의 표현 연습에도 효과적입니다. “친구가 장난감을 빼앗았을 때” 같은 상황을 연습하면서 “싫어”, “그만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말수가 적은 아동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올 수 있는 안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감정일기 피드백 대화

아이의 한마디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그 다음 말을 결정합니다.

표현은 시도보다 반응이 더 중요합니다. 아이가 감정을 드러냈을 때 어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표현 습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8세 남아가 감정일기에 “오늘은 아무도 나랑 안 놀아서 속상했어요”라고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사는 “그 말을 써줘서 정말 고마워. 많이 속상했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습니다. 참아왔던 감정이 비로소 안전하게 흘러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표현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아이에게 큰 안도감을 줍니다. 부모 역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말을 망설일 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 마음 들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표현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아이의 말은 점점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됩니다. 감정표현은 기술이 아니라 ‘안전함 속에서 자라는 습관’입니다.

아이의 침묵은 아무 말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꺼내지 못한 말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금 더 천천히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는 자신의 속도로 마음을 열 준비를 합니다. 그 시간을 믿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입니다.

말수가 적은 아동에게 감정표현을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말하기 훈련이 아니라, 감정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그림일기, 감정카드, 역할극, 그리고 따뜻한 피드백은 모두 그 공간을 넓혀주는 도구입니다. 표현하지 않는 아이는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표현해도 괜찮다는 경험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의 조용한 하루 속에는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내기보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그 기다림 속에서 아이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세상 밖으로 꺼내기 시작합니다.